‘공공기관 혁신’이라 쓰고 ‘안전인력 감축’이라 읽는다읽음

이효상 기자

정부 지침 따라 공공기관 기능·예산·인력 축소계획

‘탈선 10번’ 철도공 313명 감축안… TF, 4배 늘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소속 패트롤 점검팀이 2019년 11월 경기 성남시의 건설현장에서 한 형틀공이 안전모와 난간 없이 이동식 비계 위에서 거푸집 작업을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소속 패트롤 점검팀이 2019년 11월 경기 성남시의 건설현장에서 한 형틀공이 안전모와 난간 없이 이동식 비계 위에서 거푸집 작업을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주간경향] 대통령의 말에는 정부의 정책 의지가 담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민 안전은 국가의 무한 책임”이라고 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엿새만인 지난 11월 4일에는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큰 책임이 저와 정부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정책 구상을 뒷받침하는 것은 인력과 예산이다. 하나라도 부족하면 행정수반이 아무리 반복해 강조했더라도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의 ‘안전’ 약속은 얼마나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을까.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부문 혁신 계획을 뜯어보면 안전이라는 정책 목표 달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진다.

정부는 지난 7월 새 정부 공공기관 혁신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혁신의 방점은 재무 효율성과 생산성 강화에 찍혔다. “공공기관 파티는 끝났다(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는 발언 직후 나온 것이어서 구조조정 우려를 동반했다. 구조조정이 이뤄진다면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안전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의 감축도 불가피하다. 기재부는 현재 충원되지 않은 정원(결원)에 대한 감축일 뿐 “현재 근무 중인 인력에 대한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추진할 계획이 없다”고 해명했다. “필수 안전인력을 감축 대상에서 제외하겠다(최승재 기획재정부 2차관)”고도 했다.

235개 기관서 6949명 감축 계획

그럼에도 우려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370개 공공기관은 지난 8월 말까지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기능조정, 인력감축, 예산감축 방안 등이 담긴 기관별 혁신계획안을 제출했다. 공공운수노조가 기관별 혁신계획안을 전수조사한 결과, 종전의 기능을 폐지·축소·이관하는 계획을 제출한 기관이 235개에 달했다. 이에 따라 이들 기관에서 줄어드는 정원 규모는 6949명으로 집계됐다.

안전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의 규모를 줄이겠다고 밝힌 기관도 적지 않다. 산업재해 예방 업무를 담당하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도 그중 하나다. 지난 5년간 산재 예방 정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공단의 사업비가 3배가량 늘었지만, 인력은 23% 증가하는 데 그쳐 정원 확대의 필요성이 컸다. 그런데도 공단은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정원을 감축하는 혁신계획안을 냈다. 공단은 문재인 정부 때 산재예방 정책의 핵심이었던 ‘패트롤 점검’ 사업을 비핵심사업으로 분류하고, 이 사업에서 28명의 정원을 감축하기로 했다. 이 사업은 건설현장 등 산재 사망사고 발생 고위험 사업장을 공단 직원들이 방문해 현장점검하는 내용으로, 공단 내부에서는 업무량 급증의 주범으로 몰려 반발을 사기도 했다. 여기에 윤석열 정부가 산재 예방 사업의 패러다임을 기존의 점검·감독 방식이 아닌 기업의 자율적 참여 방식으로 변경할 방침을 시사하자 공단은 사업 축소 계획을 냈다. 이 밖에 코로나19 집단감염을 계기로 추진된 콜센터 작업환경 개선지원 사업, 옥외노동자에게 미세먼지 마스크를 지원하는 사업 등이 정원감축 대상이 됐다.

국토안전관리원은 공동주택, 청소년 수련시설의 안전점검 기능을 이관해 정원을 감축하기로 했다. 한국가스안전공사는 액화석유가스(LPG)를 사용하는 다중이용시설의 검사 주기를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는 등의 방식으로 정기검사를 축소해 35명의 정원을 감축할 예정이다. 계획이 실행될 경우 사회 전 분야의 안전 사각지대는 종전보다 넓어질 수 있다. 확대된 안전 허점은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나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이들 계획안이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각 부처는 공공기관 혁신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해 기관별 계획안을 검토한 후 12월 중 혁신계획을 확정할 방침이다. 문제는 혁신 TF를 거치면서 안전인력 감축 규모가 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국철도공사는 정원 313명을 감축하는 자체 혁신계획안을 제출했는데, 공공기관 혁신 TF는 그보다 4배가량 많은 1241명의 정원을 감축하는 혁신안을 검토 중이다. 열차 정비 업무, 선로·전기 등 설비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안전인력’도 감축 대상에 포함됐다. 2024년 이후 개통하는 신설 노선의 소요 인력 784명을 추가로 감축 조정하는 안을 검토한 공공기관 혁신 TF는 “이중 57명이 2024년 새롭게 개통될 역에 따른 신규 설비 필수 인력(설비·전기 분야)”이라고 밝혔다.

올해 철도공사에서는 탈선사고가 10여차례, 작업 중 공사 직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4차례 발생했다. 지난 11월 5일 경기 의왕시 오봉역에서는 기관차에 화물차량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열차에 치여 숨졌다. 사고 원인으로는 현장 인력 부족이 꼽힌다. 열차 연결·분리 작업을 할 때는 한 번에 3명을 투입해야 한다. 해당 현장에는 2명만 작업에 투입된 상태였다. 지난 정부 때 도입한 주 52시간제에 맞추기 위해 노사 합의로 근무제를 개편했지만 정작 현장 인력은 충원되지 않은 데 따른 결과다.

일부 자회사들은 이미 인력 감축 착수

일부 공공기관 자회사는 벌써부터 안전인력 감축 작업에 착수했다. 모회사인 공공기관이 받는 구조조정 압력이 자회사로 전가된 탓이다. 한국지역난방공사의 자회사인 지역난방안전은 열수송관 설비의 유지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 정원을 175명에서 141명으로 감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원(163명)에서 20여명을 더 줄여야 해 업무 재배치도 불가피하다. 지역난방안전이 2018년 12월 경기 고양시 백석역 열수송관 파열 사고 이후 유지보수 업무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설립됐음을 고려하면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 그간 이 회사는 작업자의 육안점검, 열화상 카메라를 이용한 점검 등 복수의 점검 방식을 활용해 한 지점의 열수송관을 중복 점검해왔다. 인력이 줄면 점검 횟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안전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사실은 기재부가 지난 10월 내놓은 ‘2022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편람’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재부는 바뀐 경영평가 지표에서 재무효율성 배점을 종전의 10점에서 20점으로 늘렸다. 대신 사회적 가치 부문의 배점을 25점에서 15점으로 낮췄다. 안전 관련 배점은 4점에서 2점으로 줄었다.

공공기관 혁신 가이드라인이 재무 효율성에 방점이 찍히면서 안전이라는 정책 목표는 애초부터 달성이 불가능했다는 시각도 있다. 안전 업무 자체가 평상시에는 비용으로 인식되는 데다,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나 평가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찰스 페로 미국 예일대 교수 등은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사고(1979년) 등을 분석해 사고발생률이 낮은 조직을 일컫는 ‘고신뢰조직’이라는 개념을 내놨다. 고신뢰조직은 경영자의 안전에 대한 확고한 철학, 수평적 조직문화, 실패를 통한 학습 등 몇가지 요건을 갖는데, 그중 하나가 중복성(잉여성)이다. 사고 위험을 낮추기 위해서는 설비도 보조설비가 필요하고, 인력도 여유 인력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공성식 공공운수노조 정책실장은 “인력 감축뿐 아니라 발전시설 정비 등 안전과 밀접한 부분의 예산 삭감도 혁신계획안에 포함돼 있어 안전 위험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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