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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국민 밉상' 전락한 사외이사 … 똑똑한 거수기가 더 위험하다

입력 : 
2023-05-31 16: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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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지 않은 사외이사 역할과 책임
◆ Big Pictu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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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수기로 회의 몇 번 출석하고 거액의 연봉을 챙기는 사외이사가 국민 밉상으로 고착됐다. 횡령과 분식회계 사건이 터지면 사외이사는 뭘 했느냐는 비난이 어김없이 쏟아진다. 근래에 와서 법원이 사외이사 손해배상책임을 엄중하게 묻는 판결을 계속 내놓고 있다.

사외이사제도는 철도, 철강, 자동차, 전력 부문에서 거상이 출현해 거대한 주식회사를 창업한 미국에서 시작됐다. 초기에는 창업주가 경영을 직접 주도했으나 생전에 주식 대부분을 공익사업에 출연하면서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인 최고경영자(CEO)에게 넘겼다. 미국 사외이사제도는 외부 인사를 이사회에 참여시켜 경영효율을 높일 목적으로 도입됐다. 탁월한 경영성과를 인정받은 기업인을 영입해 고액의 연봉과 성과 보상을 약정하는 시장원리가 정착됐다.

한국은 1997년 시행된 민영화특별법에서 4대 공기업에 비상임이사를 둔 것이 시발점이다. 민영화법은 정부가 경영권을 보유한 한국통신(KT), 한국담배인삼공사(KT&G), 한국가스공사, 한국중공업의 민영화를 위해 김영삼 정부가 구상했다. 그러나 정권교체와 맞물려 매각을 통한 민영화라는 본래의 목표는 후퇴했고 1인 지분 한도를 10%로 제한하는 등 소유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조정됐다. 한국중공업은 두산그룹에 넘겨 민영화를 종료했지만, KT, KT&G, 한국가스공사는 애매한 정체성 때문에 정권교체 때마다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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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는 민영화법 비상임이사제도를 참조해 상장회사에도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했다. 사외이사 주도로 대주주의 사익 편취를 막고 경영을 감시하는 것이 기본 구도다. 그러나 주주총회 표결로 사외이사를 선임하기 때문에 대주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친분 있는 전직 관료 등 대관업무에 도움이 될 인사가 선호됐고 대학교수도 많이 선임됐다. 보상은 미국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적지만 '놀며 하는 일'로는 대단한 돈벌이가 아닐 수 없다. 사외이사 과실과 관련된 부정적 사건은 자세히 공개되지만 문제없이 넘어가는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사외이사의 실제 활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회계학 교수인 필자의 경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KT&G 사외이사를 1997년부터 9년간 맡았다. 사장을 제외한 이사회 구성원 전부가 사외이사였고 감사위원회도 설치됐다. 정부 방침에 따라 집중투표제 등 주주권 확대 방안이 광범위하게 도입됐다. 필자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에는 해외 펀드의 공세가 본격화됐다. 기업 사냥꾼으로 알려진 아이컨과 리히텐슈타인이 외국인 주주를 결집해 사외이사후보를 추천하면서 집중투표를 요구했다. 정원 3인 중의 1인은 출석지분 3분의 1만 확보하면 당선되는 방식이어서 리히텐슈타인이 과반에 못 미치는 표를 얻고도 이사가 됐다. 사실 정부의 영향권에 있는 회사의 지배구조가 더 문제다. KT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강철 참여정부 사회문화수석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는데 정권이 바뀌자 지난 1월부터 줄줄이 사퇴하면서 난장판이다. 한국전력의 허약한 사외이사 구성으로는 적자 누적과 빚더미를 막을 수 없다. 민간기업을 탓하기 전에 국책은행을 비롯한 공기업 등 정부 영향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현대자동차와의 지분 정리가 끝난 이후 현대산업개발의 사외이사를 맡았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부채비율 200%를 금과옥조로 밀어붙였는데 빌딩 건축 관련 부채 때문에 금융권 압박이 심했다. 보유 건물의 가치는 따지지 않고 부채를 자본으로 나눈 부채비율만 들이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계열사가 많은 그룹은 순환출자로 회사마다 자본을 중복계산해 빠져나갔다. 현대산업개발도 금융회사 설립 등 자구책을 마련했지만 결국은 건물을 매각했다. 지금의 강남파이낸스센터 빌딩을 놓고 외국자본이 돌아가며 막대한 차익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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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사태가 심각해지던 2002년 현대산업개발을 사임하고 LG카드 사외이사를 맡을 사정이 생겼다. 지분 참여한 해외 펀드 소속 사외이사를 제외한 2인이 회계전문가로 교체됐다. 반기결산까지 확인한 회계전문가 두 사람은 LG카드가 업계 1등을 유지한 비밀을 알아냈다. 카드사는 고객이 카드결제나 현금서비스로 사용한 금액을 외형으로 순위를 매긴다. 실적이 부진하면 사장 주도로 고객의 카드 사용한도를 늘려줬고 한계고객이 이를 즉시 활용함으로써 선두를 유지한 것이다. 대표이사 사장은 경질됐고 부사장이 사장직을 승계했다.

오랫동안 카드채를 인수하던 은행이 신규 인수뿐만 아니라 차환도 거절하기 시작했다. 외국계 금융회사는 파생상품 요소를 가미한 단기자금을 들이밀었는데 거래 구조를 파악하고 숨은 위험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밤을 새운 날도 많았다.

전환사채 발행이 마지막 카드로 남았는데 리픽싱(refixing) 옵션을 가미해 주가가 하락하면 교부할 주식 수를 늘려주는 방식을 구상했다. 당시에 현대산업개발 대주주가 자기 회사 리픽싱 전환사채를 사모로 인수해 얻은 차익을 회사에 반환하라고 참여연대가 들볶고 있었다. LG카드가 리픽싱 조건 발행을 성공시키면 현대산업개발도 거래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환사채 발행은 주가에 미칠 영향이 커서 이사회 결의 후 공시하기까지 내부정보 단속에 극히 주의하면서 신속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발행 결의를 위해 소집된 이사회 당일 문제가 생겼다. 필자가 리픽싱이 상한에 도달해도 발행주식이 수권주식 수 범위 내에 있는지를 확인했더니 법무팀이 한참 계산한 후 모자란다는 것이다. 수권주식 수 범위를 초과하는 전환권은 위법일 것이 확실해 법무팀 의견을 물으니 횡설수설이었다. 3대 법무법인에 서면 의견서를 요구하고 회의를 연기했는데 2개 법무법인이 위법이라고 회신했다. 수권주식 수를 늘리는 주총부터 먼저 열어야 했고 리픽싱 전환사채 발행은 한동안 지연됐는데 그사이에 현대산업개발 대주주는 전환권을 포기했다.

LG카드는 결국 채권단에 넘어갔고 사외이사는 모두 사임했다. 수개월 후 검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참고인 진술을 받을 일이 있으니 내일 와달라는 요구였다. 당시 대학 체육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축구감독이 입시와 관련된 수사를 받고 있어 그 사건으로 생각했다. 선처 호소를 준비하고 검찰에 갔더니 LG카드 주식 수사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사에 관한 소문은 들었지만 내용을 잘 모르는 상황이라 당황스러웠다. 검찰 주장의 요지는 손실 규모를 미리 알아낸 내부자가 주식을 팔아 자기의 손실을 줄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카드사 손실 대부분은 고객 미수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대손이며 회계상 대손은 추정에 의해 계상하기 때문에 주가와 직접적 관련이 없음을 강조했다. 대손이 추정이라는 말에 검사는 "그럼 조작이 가능하겠다"며 흥분했다. 참고인 진술서에 서명하고 귀가했는데 후에 피고 측 변호인이 찾아와 증인으로 신청하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재판정에서 검찰이 제시한 참고인 진술서에 대한 반대심문에 나선 변호인은 대손충당금에 대해 강의시간 모범생처럼 또박또박 질문했다. 대손은 미래에 발생할 사실에 대한 추정이며 이에 대한 대손충당금을 쌓더라도 실제 발생액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대손 추정에 대한 정보가 주가에 미칠 영향은 예측할 수 없음을 증언했다. 결국 내부정보 이용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2005년부터 GS홈쇼핑에서 한 10년간 경험은 독특했다. 대표이사의 재무전문성이 뛰어나 경영 감시보다는 사업 자체에 대해 많이 논의했다. 방송인, 기업인, 회계전문가로 구성된 사외이사와 집행부 사이의 대화 폭이 넓어 보유하고 있던 지역민방 주식을 언제 처분할지와 완판 전문방송인 쇼핑호스트를 어떻게 영입할지도 논의했다. 넥슨 창업주인 고 김정주 이사의 번뜩이던 천재성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정보통신과 유통의 결합이 필요했던 시기에 홈쇼핑의 변화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조선업이 활황이던 2007년부터 STX조선해양(현 케이조선) 1년과 현대중공업 3년을 합쳐 4년간 사외이사를 맡았다. 삼성중공업의 100% 수준 환헤지를 답습하는 STX에 위험성을 계속 제기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은 환헤지 비중을 적절히 통제해 나중에 고환율과 조선업 불황이 함께 닥친 위기상황을 넘기는 데 도움이 됐다. 지금은 정상화됐지만 과열된 환헤지가 조선업의 리스크를 키운 사실은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이만우 '조선사 환헤지에 수출기업 멍든다' 매일경제 2011년 7월 28일자 기고 참조).

2014년부터 6년간 신한금융지주 사외이사를 맡았는데 사후에 겸직 금지 조항이 신설돼 현대해상화재는 중도에 사임했다. 금융지주회사 사외이사는 사회적 관심도 많고 업무도 복잡했다. 감사위원장으로서 강의시간에 다뤘던 많은 분야를 직접 경험했고 2017년에는 한국ESG기준원 기업지배구조평가에서 최초로 S등급을 받았다. 비상장 자회사 감사위원과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업무 조율을 계획한 점이 높이 평가됐다. 그러나 자회사 조율의 실제 집행은 투자증권에서 반발한다며 다른 감사위원이 반대해 무산됐다. 당시 성과보상제도를 자회사별로 운영했는데 성과급을 합친 보수를 따져보니 투자증권 본부장이 그룹 회장보다 많았다. 성과급을 목표로 고수익을 추구하면 위험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에 대한 통제방안을 찾으려다 반대에 부딪혔다. 최고의 성과급을 받았던 본부장은 그 이후 라임무역금융 관련 펀드 제안서에 거짓 사실을 기재해 투자자를 모은 범죄사실이 드러나 징역 8년을 선고받고 현재 수감 중이다. 지주회사만 상장하고 비상장 자회사 이사회가 따로 설치된 경우 지주회사 이사회와 감사위원회의 조율권은 인정돼야 한다.

사외이사 업무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회계법인과 법무법인이 사외이사와 감사위원 업무와 관련된 회계 및 법무 정보를 담은 책자를 계속 발간하고 있다. 3인의 사외이사 전원이 감사위원인 경우는 주의할 사항이 더 많다. 삼정KPMG는 2015년에 발간한 '감사위원회 핸드북'을 계속 업데이트 중인데 이번 달에는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의 법적 책임에 대한 최신 판례와 해외 기업 모범사례를 추가한 3차 개정판을 발간한다. 적격한 사외이사가 되기 위해서는 독립성과 전문성이 필수적이다. 전문성이 없으면 무익한 것으로 끝나지만 독립성이 없으면 대주주의 부당한 경영권 행사에 가담하거나 방조할 위험도 생긴다. 사외이사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점차 가중되는 법적 책임에도 충실히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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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우 고려대 경영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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